번역과 말투, <개선문>을 읽고서 읽음

레마르크의 <개선문 1, 2>(장희창 옮김, 민음사)을 읽었다.
2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파리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피난민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어두운 시대가 우정, 연대, 복수,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뒤섞인다.
하지만 흔한 할리우드 영화들에서와 달리, 로맨스가 전체 이야기를 뒤덮어 균형을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사랑도, 소설도 여운을 남기며 깔끔하게 결말이 지어진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
바로 대화의 번역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 라비크(남자고 의사다.)와 연인 조앙의 대화를 옮긴 대목들이다.
첫 번째 예문은 라비크와 조앙이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대화고 두 번째 것은 둘이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의 대화다.

"앞으로 무얼 할지 생각해 보았어요?" 라비크가 물었다.
"아뇨, 아직."
"이곳으로 왔을 때 무슨 할 일이라도 있었던 거요?"
여자는 망설였다. "아뇨, 별로 할 일이 없었어요."
- <개선문 1>, 104쪽

"그때 제게 마시라도 주신 건 어떤 술이었어요?"
"언제? 여기서? 그때는 이것저것 섞어 마셨는데."
"아뇨, 여기서가 아니라. 그 첫날 밤에 말예요."
라비크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이 안 나. 코냑 아니었던가?"
- <개선문 1>, 172쪽

처음에 두 사람은 서로 존댓말을 썼는데 나중에는 라비크는 반말을, 조앙은 존댓말을 쓰고 있다.
옮긴이로서는 두 사람이 초면이 아니고 어느 정도 친근해졌기에 이를 표현하기 위해 말투를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조앙만 여전히 존댓말을 쓰는 것일까?
이후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되었을 때도 조앙은 계속 존댓말을 쓴다.
연인이라면 둘 다 반말을 쓰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 조앙이 말하는 부분을 반말로 고쳐서 읽어 보기도 했다.
역시 연인이 굳이 서로 다른 말투를 쓸 필요는 없다.

또 하나의 대안으로는 둘 다 존대말을 쓰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연인 사이에, 심지어 부부 사이에 서로 존대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문학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서는 남녀 연인이 시종일관 서로 존댓말을 쓴다.
그럼에도 어떤 어색함이나 거리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근함과 진심 어린 배려가 독특하게 전달된다.
<백의 그림자>가 세간의 평가처럼 좋은 작품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다정한 존댓말'은 이 소설의 장점이다.

사실 애초에 독일어에는 존댓말, 반말이 없다.
친근한 사이에서 쓰는 호칭(du)과 그렇지 않은 경우에 쓰는 호칭이(Sie)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한쪽이 친근말 호칭을 쓰면 반대쪽도 마찬가지 호칭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번역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나름 한국 문화를 고려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말투로 (아마도 별 의식 없이) 번역했을 수 있다.
게다가 남자 쪽이 여자 쪽보다 열 살 이상 나이가 많고 처음 만났을 때 여자의 조력자 역할을 하니까.
라비크가 조앙 외 인물과 대화할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여자 환자 케이트와 라비크는 기본적으로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그런데 케이트가 오직 존댓말을 쓴다면, 라비크의 말투는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오간다.
대체로 어미 "~요"를 쓰다가도 "~지", "~ㄴ걸" 하는 식으로 은근슬쩍 말을 놓아 버린다.
반면 라비크가 남자 친구인 모로소프와 대화할 때는 오직 반말만 보인다.

남녀 사이 대화에서의 격차는 번역 소설을 읽을 때 자주 눈에 띈다.
물론 18세기, 19세기처럼 신분, 계급 질서가 공고하고 남녀 사이 격차가 크던 시대의 작품을 옮길 때는 한국식 존댓말, 반말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지금이 1970년대나 1980년대라면 남녀 간 불균형한 말투가 오히려 한국 독자에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른바 남녀 평등의 시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안이 있는데도 한국식 문화를 따지며 원문에 없는 격차를 번역에서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변해 가는 시대, 젊어지는 독자층에 맞춰 번역도 변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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